중독을 바라보는 시선 [천영훈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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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작성일 : 18-12-12 17:45 조회 : 4,14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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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을 바라보는 시선
올해는 겨울이 일찍 찾아온 것 같더니 벌써 연말이 되었습니다.
예년처럼 전국은 연말연시 술자리들로 떠들썩하겠죠? 관심 있는 분들은 대중매체를 통해서 소식을 접하셨겠지만
최근 국회에 제출된 4대 중독법안에 대해 논쟁이 뜨겁습니다.
이미 우리나라는 알코올 중독, 도박 중독 등 치료적 개입이 필요한 중독자의 수가 최소 300만, 많게는 600만 명에까지 이르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외국 여행을 해 보신 분이시라면 느끼시겠지만 소위 국가 시스템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OECD 회원국들 중 편의점에서 아무런 제약 없이 맥주를 비롯한 독주들(양주, 소주 등)을 24시간 아무 때고 편하게 사갈 수 있는 곳은 대한민국이 거의 유일한 실정입니다. 강원랜드 카지노에 가 보셨나요? 새벽 무렵 정문 앞에 한 시간만 서 있어 보시면 불나방처럼 일확천금을 쫓아서 모여든 퀭한 눈의 사람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주택가에는 성인오락실 간판을 단 사설 도박장들이 비집고 들어와 있고 경마는 경마장에서 이루어진다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도심 곳곳에 위치한 경마중계소들에는 발디딜 틈이 없습니다.
동네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사라졌습니다. 이미 놀이터의 그네는 버젓이 담배를 입에 물고 애정행각을 서슴지 않는 중고등학생들이 점령했지요.
아이들은 어디로 간 걸까요? 다들 학원에 미래를 인질로 붙잡혀 있거나 이 화려한 젊은 날 PC 방에 쳐박혀 있습니다. 그나마 PC방에 꾸준히 출근할 경제력도 안되는 아이들 중 몇몇은 지하실에서, 부모님이 일 나가 비어버린 빈집 골방에 모여 본드를 불고 있습니다.
중학생을 둔 부모님이시라면 아이들을 붙잡고 한번 물어보십시오. ‘요즘 유행하는 게임이 뭐니?’ 10명 중의 9명은 ‘롤(LOL: League of Legends)이요!’라고 대답할 겁니다. 롤은 지금까지 개발된 게임들 중 가장 화려하고 다양한 캐릭터들과 강한 중독성을 지닌 전략 시뮬레이션으로써 PC방은 물론 아이들의 세계를 점령해 들어가고 있습니다.
예전에 동네에서 모여서 옹기종기 농사짓고 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사실 먹고 살기 빠듯했던 그 시절에 놀거리란 그리 흔치 않았었습니다. ‘생존’이 삶의 유일한 목표였고 가장 강한 ‘욕망’이었죠. 인류가 배고픔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아직도 지구촌 곳곳에는 기아와 질병으로 ‘생존’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있지만 그 반대의 세상에서는 매일매일 생존을 떠나 ‘욕망’과 ‘쾌감’을 만족시키기 위한 전투들이 치러지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인류 역사상 현시대처럼 많은 욕망과 쾌락의 도구를 지녀본 시대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쾌감의 추구는 그것이 먹는 것이든, 보는 것이든 우리의 일상이 되었고 ‘중독’은 우리 모두의 앞에 도사린 문제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중독의 위험성 앞에서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것이 과연 합당한지는 돌아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수년 전에 대마초 합법화를 주제로 심야 TV 토론이 이루어진 적이 있습니다. 당시 별 소득 없는 난상 토론이 이어졌지만 대마 옹호론자로 나섰던 한 가수의 이야기는 강한 인상으로 남습니다. ‘내가 대마초를 피웠다고 해서 대한민국 정부가 날 가둘 수 있는 법적 근거를 가지고 있을지 몰라도 날 구속할 수 있는 윤리적, 도덕적 지위는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정부가 모든 중독성이 있는 것들에 대한 장사를 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구보면 술 값의 반을 차지하는 그 어마어마한 주세는 정부가 가져가는 것입니다. 장관님들과 국회의원님들은 외국 여행을 해 본적이 없으셔서 편의점에서 24시간 내내 버젓이 술을 팔도록 하고 TV 광고에서 빅뱅과 같은 아이돌 스타가 소방 호스로 청소년들의 가슴 속으로 맥주를 뿌려대는 걸 내버려 두는 걸까요? 맥주 회사에서 청소년의 우상을 맥주 광고에 쓴다는 것은 이미 중고등학생을 주 고객층으로 삼고 있다는 선언이며 청소년 음주를 금지한 우리 사회에 대한 심각한 도전입니다.
담배 인삼 공사, 강원랜드 카지노, 마사회, 경륜, 경정, 각종 복권 등 실질적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중독성 산업을 통해 막대한 재원을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듯 술과 담배를 팔고, 도박장을 운영하고, 경마장과 경마중계소 등을 통해서 벌어들인 돈의 몇 %가 이로 인해 인생을 날려버린 중독자들과 그의 가족들을 위해 쓰이고 있는 걸까요?
단적인 예로 엄청난 가정이 술로 인해 파괴되고 있음에도 음주 폐해 감소를 위한 홍보 및 캠페인 예산은 전체 주류 광고 예산의 0.005% 수준에 불과합니다.
국가는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시스템을 마련하고 이에 대한 재원을 조달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 중독 문제의 예방과 개입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체계적인 접근과 투자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4대 중독(술, 도박, 인터넷 게임, 마약)법안을 비롯한 진행되고 있는 몇몇 법안들은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너무 뒤늦은 대책일지도 모릅니다.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이 법안의 궁극적인 목적은 중독관련 산업을 규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사회는 술, 담배, 컴퓨터와 인터넷이 없는 구석기 시대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다만 법 체계를 마련함으로써 중독예방치료와 폐해 완화를 위한 국가의 책임을 규정하고 정부 부처별로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관련 업무를 국가중독관리위원회를 통해 체계적인 계획 하에 이루어지도록 하자는 취지입니다.
하지만 같은 4대 중독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게임이 마약이냐!’라는 구호를 내세운 게임업계와의 마찰로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법안의 취지가 ‘제한과 제약’이 아닌 ‘예방과 조기 발견’임에도 게임 산업의 위축을 우려하는 입장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게임 산업이 연 매출 10조의 고부가가치 산업이기에 중점 육성해야 한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게임은 이미 우리 안에 자리잡은 문화이고 엄청난 가능성을 가지고 발전해 나갈 수 밖에 없는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수의 게임 중독자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10조의 벌어들인 돈을 누가 가져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어른들의 돈 벌이를 위해서 서로 만나고 세상을 경험하고 소통해야 할 청소년들의 젊은 청춘이 컴퓨터 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생각한다면 끔찍한 손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종도에 대규모 도박장이 들어선다는 뉴스 보도가 들려오는 흉흉한 연말입니다. 오락과 여가라는 미명하에 벌어들이는 막대한 돈의 이면에는 나락으로 떨어진 수많은 가정의 절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누가 왜 이런 사업을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해 나가는 지, 그로 인해 벌어들인 막대한 수익이 어떻게 쓰이는지는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중독이 만연한 현실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중독에 대한 예방과 홍보, 중독자에 대한 조기 발견과 조기 개입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계획만이 최소한의 안전판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중독은 다양한 삶의 경험과 기쁨들을 빨아들이는 괴물과 같습니다. 공부 중독, 일 중독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이 컴퓨터와 학원 책상을 벗어나 산과 바다로, 함께 어울릴 사람들 속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우리 모두가 바라는 소망이 되었으면 합니다.
[인천광역시 정신보건사업지원단 뉴스레터 201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