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가 된 어느 정신질환자를 위한 변명 [천영훈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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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작성일 : 18-12-12 17:49 조회 : 4,08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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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가 된 어느 정신질환자를 위한 변명
강남의 한 상가 화장실에서 아무 이유 없이 한 생명이 죽어야 했다. 언론에서는 소위 ‘묻지마’ 살인이라고 대서특필을 해댔고, 이후 온라인에서는 여성혐오 논쟁이 벌어지고, 희생자를 기리는 꽃다발이 강남역 일대를 뒤덮었다. 기사를 접한 순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이라면 당연히 느꼈을 것이다. 세상에 ‘이유 없는’ 살인이 있을 수 있겠는가... 살인을 통해서 얻고자 했던 분명한 이유가 없었다면 이건 아마도 정신적 문제를 가진 사람의 행위였을 것이라는 것은 이 분야의 전문가로서 가질 수 밖에 없는 당연한 추론이기도 했다. 이후 용의자가 조현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쟁들은 보다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로서는 개인의 정신질환으로 퉁치고 넘어가려는 의도라며 저항했고, 정신건강의학과 학회에서는 당연히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공포를 우려(만?)했으며 경찰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주취자 문제 등 그동안 골치 아팠던 문제들을 개정될 정신보건법의 강제 입원조항 속에서 해결하고 싶어 했다. 일부 정신질환자 인권 옹호 단체에서는 모든 문제를 조현병 때문인 것으로 몰아가는 것에 격렬히 저항했다. 나중에는 조현병의 피해망상에 의한 살인이 맞지만 피해망상의 내용이 그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하듯이 여성혐오의 사회적 현실이 피해망상에 영향을 끼친 것이라는 나름의 절충안(?)까지도 등장했다.
하지만 강남역이 꽃다발로 뒤덮여가고 온라인에서의 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서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마스크를 한 그 살인용의자에 대한 일말의 동정을 기대한 것은 너무 오바였을까? 아마도 그 모자와 마스크도 스스로가 아닌 누군가 옆에서 눌러 씌워줬을 그 용의자 아니 정신과 의사 입장에선 ‘우리 환자’였을, 타인을 해쳤지만 그 자신도 방어할 능력이 없었던 그 사람 또한 희생자로 바라보게 되는 것은 내 직업 탓일지도 모르겠다.
정신과의사라는 직업상 의외로 내 질문은 다른 방향을 향할 수밖에 없다. 살인이라는 너무도 명백한, 용서받지 못할 범죄를 떠나서 살인을 해야 할 정도의 피해망상에 시달려야만 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끔찍한 삶이었을 것이다. 약을 꾸준히 복용하고만 있었어도 그런 피해망상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그 환자는 왜 약을 복용하고 있지 않았던 것일까. 그런 무시무시한 지속적 망상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을 텐데 왜 주변의 아무도 그의 생각을 알 수 없었을까, 왜 그런 망상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 속에 섬처럼 살아가고 있어야만 했었을까, 소위 정신보건법을 비롯한 치료 시스템이란 것은 이 과정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었던 걸까 등등.
사실 이 끔찍한 사건들을 대하면서 정작 우리가 직면하고 고민했어야 할 문제는 ‘여혐’이나 잠재적으로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고 우리 사회에서 격리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문제를 가진 이들이 제대로 치료받고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을 것이다.
소위 ‘강제입원’으로 대표되는 비자발적 입원에 대한 인권단체들의 헌법 소원이 진행 중이지만 어느 인권 단체도 평범하게 우리 곁에서 같이 지낼 수 있었을 이 환자를 살인마로 만들어버린 부실한 치료 시스템에 대해 항의하지 않았다. 정신장애인의 인권의 개념에는 내가 원하지 않으면 치료받지 않을 권리만이 존재하고, 반대로 사회로부터 보호받고 정당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는 포함되지 않는 것 일까?
조현병으로 대표되는 정신질환의 범죄율이 일반 사회인의 범죄율보다 높지 않다는 식의 섣부른 주장들로는 미디어를 통해 보도되는 정신질환관련 범죄들과 이로 인한 끔찍한 사회적 편견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범죄율이 높지 않다는 주장에는 중요한 단서가 간과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적절하게 치료받은’이라는 전제 조건이 붙어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 ‘적절함’이 우리가 바라보고 집중해야 할 지점이기도 하다.
대대로 대한민국 정부는 지극히 낮은 정신과 진료비에 기대어 국가가 짊어져야 할 책임들을 방기해왔다. 만성 질환으로 인해 대부분이 의료급여 상태인 정신과 환자의 하루 입원비가 4만원대이고 외래 진료비가 3천원도 안되는 상황에서, 병원에 입원시켜놓으면 먹여주고, 재워주고, 약주고 다 해주는 상황일진데 정부로서는 굳이 정부가 나서서 지역사회 정신보건시스템을 구축하고 정신질환자들을 위한 거주시설이니 직업시설 등을 만들어야 할 경제적 이윤 동기를 갖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루 입원비만 최소 100만원이 넘어가기에 병원에서 퇴원시켜 지역사회에 투자를 할 수 밖에 없었던 미국 등 서양 선진국과는 상황이 달랐던 것이다.
이미 효과가 입증된 한 달에 한번 주사만 맞으면 되는 장기지속형 주사제가 20만원 가까이 하는데 외래 진료비가 3천원인 상황은 코메디라고 하기엔 이미 도를 넘어선 지경이다. 또한 퇴원한 환자가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이 전무한 지금에서의 탈원화는 넌센스일 뿐이다. 단순히 의료 숫가의 인상이 의사들 배만 불려준다는 식의 접근으로는 지금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그러한 논리를 통해서 그동안 누가 이득을 보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논리들은 정신질환자들의 재활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과 무대책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도구로 이용되어 왔을 뿐이다.
지금이라도 정신질환자들이 제대로 병원 안은 물론 병원 밖의 지역사회에서도 치료받고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에 대해 머리를 맞대야 할 때이다. 각 직역의 이익과 호불호를 떠나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은, 그 해답은 마음의 병을 앓고 살아가는 ‘환자’에게서 찾아야 하며 ‘환자’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점이다. 환자들이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고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찾아주는 것이야 말로 정신질환자의 인권에 있어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며 다시는 강남역 살인사건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는다.
[한국정신건강신문 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