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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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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어르신을 돌보는 가족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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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참사랑병원

작성일 : 12-07-30 16:22 조회 : 5,24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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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어르신을 돌보는 가족들에게



진료실에서 또 치매센터에서 치매를 안고 살아가시는 어르신들을 뵈면서 또 그보다 더 많은 가족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질병이 가장 무서운 이유는 어르신 스스로에게도 좌절과 실망을 안겨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치매 어르신을 돌보아야 하는 가족들에게는 형벌과 같은 부담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하지만 제가 만난 많은 가족들이 그러한 고통을 치매 어르신에 대한 사랑으로 감싸고 보듬어 가면서 견뎌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분들의 헌신적인 모습에 때론 울컥하기도 하고 정작 부모님께 소홀한 저 자신을 돌아보게도 됩니다.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의 세계에 들어서면서 경험하고 배운 것이지만 정말 누군가를 변화시키고 지켜낸다는 것은 훈계와 지적을 통해서가 아닌 정성과 사랑을 통해서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치매에 걸린 부모님을 헌신과 사랑으로 돌보는 과정에서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은 그러한 헌신과 사랑만큼 깊게 드리워지는 그림자가 분명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더 고집이 세어지시고 밤새도록 돌아다니시는 어머니를 지켜보면서 느끼게 되는 절망과 암울함은 돌보는 가족들의 마음에 또한 깊은 병을 새겨놓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치매라는 병은 어쩌면 우리 부모님이 겪어나가야 할 병이라기보다는 가족들 자신이 겪게 되는 병일지도 모릅니다.
진료실에서 처음 치매를 진단받게 되는 어르신의 가족들에게 저는 제일 먼저 다음과 같이 말씀드립니다. “많이 힘드시겠지만, 앞으로 어르신께서는 나빠지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전의 모습을 되찾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노력해서 어르신을 치료적으로 잘 돌보아드린다면 어르신께서 가진 건강한 모습들을 보다 오랫동안 유지해 나갈 수 있습니다.”
치매라는 병의 가장 절망적인 특징은 이제 내리막길로 들어섰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 어르신을 모시고 내리막길을 같이 따라 내려가야 할 가족들에게 필요한 것은 섣부른 기대보다는 냉정한 현실을 직시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마음을 가다듬고 용기를 가져보는 것일 겁니다. 자, 이제 아랫배에 힘을 주고 심호흡도 하고 멀리 내다보아야 합니다. 어르신께서 조금 좋아졌다고 환호할 일도 조금 나빠졌다고 당장 절망할 일도 아닙니다.
섣부른 기대도, 섣부른 절망도 가족은 물론 정작 치매를 앓고 계신 어르신께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접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의 사랑과 정성으로, 내 모든 희생을 통해서 치매에 걸린 어머님을 돌보겠노라는 ‘욕심’입니다. 어르신을 돌보는 데는 당연히 사랑과 정성, 희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인정해야만 하는 진실은 그러한 사랑과 희생이 치매 어르신의 상태를 되돌릴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돌보는 가족이 정작 자기 자신의 삶을 잃어버리고 무조건적인 정성과 희생으로 치매 어르신께 매달리는 것은 모든 시도를 무산시키는 치매라는 병의 특성상 절망과 좌절만을 되돌려 줄 뿐이며 그로인해 돌보는 가족 자신의 삶이 무너지는 결과를 낳을 뿐입니다.
정작 자신의 삶이 무너져버린 가족이 치매에 걸린 어르신을 잘 돌볼리는 만무합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희생을 했는데도 돌처럼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더 안 좋아지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자괴감이 들고 때론 분노의 감정이 들기까지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치매 어르신을 모시는 가족들은 우리의 사랑과 헌신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한계를 냉정하게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당분간 위험한 내리막길을 어르신을 보듬고 내려가야 하기에 돌보는 나 자신이 더 건강하고 활기에 차 있어야만 합니다. 때론 이유 없이 짜증만 내시고 일거리만 만드시는 내 어머니가 미울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아픈 어머니를 미워하다니... 하며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미운 감정이 드는 것도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한 반응으로 받아들이고 나 자신을 질책하지 말아야 합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는 내가 미워서 그리 행동하시는 걸까요? 우린 그것이 어머니도 어쩔 수 없는, ‘병’으로 인한 ‘증상’일 뿐이란 걸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화가 나다가도, 속상해서 울다가도 어머니를 사랑하는 원래의 내 자리로 돌아와서 어머니 곁을 굳건히 지키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치매를 앓고 계신 내 어머니 곁에 필요한 사람은 어떤 순간이건 간에 평정심을 잃지 않고, 365일을 웃음으로 대할 수 있는 예수님이나 부처님 같은 성자가 아닙니다. 치매 걸리신 어머니 곁에 필요한 사람은 때론 같이 짜증내고 같이 울고, 어이없이 화도 내는 인간, 바로 ‘내 새끼’인 것입니다. 우리 가족들은 이미 기대 이상의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다. 치매에 걸리신 부모님이 나빠지시는 것은 내 사랑과 정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원래 그런 ‘병’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님을 이해하고 돌보는 것만큼 어머니 곁을 오랫동안 지켜드려야 할 나 자신을 이해하고 돌보고 위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내가 치매에 걸린 부모님 곁을 지켜드릴 순 없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치매 센터에서나 진료실에서나 어르신의 치매가 너무 진행되어서 가정에서는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처한 가족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많은 가족들이 이렇게 들 이야기 합니다. “우리 형제가 몇 명인데 어머니 한분을 집에서 모시지 못하고 요양원 같은 데로 보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런 주장들을 하시는 가족들은 대개 치매 어르신을 직접 모시지 않는 가족 구성원이거나 하루 종일 아내에게 치매에 걸린 부모님을 맡겨놓고 바깥 일만 보게 되는 남편들인 경우가 많다는 점이지요.
과연 치매에 걸린 어르신을 무리해서 집에서 돌보는 것이 합리적인지, 적어도 어르신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결정일지는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우선 꼭 기억해 두셔야 할 점은 치매에 걸렸다고 해서 어르신의 모든 인지기능, 정서, 느낌, 사고 등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한창인 나이에 사회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젊고 건강한 우리들이 수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듯이 치매를 앓고 계신 어르신 또한 수많은 스트레스 속에 놓여 있습니다. 건강한 우리들이야 노래방을 가건, 여행을 가건, 때론 영화를 보며 그런 스트레스들을 풀고 회복해 나갈 수 있겠지만 점점 자신이 가졌던 기능들을 잃어가고 계신 어르신들에게는 스트레스를 적절하게 배출하고 원기를 회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어르신 스스로도 자신의 기능들이 예전 같지 않다는 인식을 하고 계시기에 치매 자체만으로도 우울증을 유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약 50년 전만해도 우린 농경사회였고, 사돈의 팔촌까지 대부분 같은 동네에 모여 살았지요. 그때는 오래 사시는 분이 드물었기에 동네에 치매 어르신도 드물었고, 또 설령 계시다 해도 대가족이 모여 사는 가운데서 어르신 한 분 돌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터라고 해 봐야 집에서 몇 발자국 걸어가면 있는 논과 밭이었고, 며느리가 밭을 매는 동안 ‘어머니 여기 옆에 앉아 계셔요’ 하고 있어도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쌩쌩 트럭들이 달려 지나가는 도로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죠.
하지만 지금은 핵가족 사회로 한 가족 구성원이라 해봐야 4명입니다. 그나마 손자들은 학원이다 학교다 집에서도 볼 시간이 없고 아들 놈은 먹고 살 일로 밖에 나가 정신없고, 며느리도 만만치 않게 바쁩니다. 집을 나서면 다 그게 그거 같은 상자 같은 아파트 천지에 도로에선 차에 치이기 십상이지요. 결국 집에만 있어야 합니다. 집엔 왠 고장 날 만한 물건들, 위험한 물건들 천지인지, 어르신은 하루 종일 잔소리만 듣게 되지요.
이런 현실에서 치매가 어느 정도 진행되어서 여러 가지 행동 증상들이 많아져버린 치매 어르신을 집에서 돌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집에만 계시던 치매 어르신이 치매 센터를 나오기 시작하시면서 엉뚱한 행동도 없어지고 잠도 잘 주무시고, 정신도 더 또렷해 지셔서 너무 신기하다는 이야기를 가족들로부터 많이 듣습니다. 저희 치매센터에서 차려드리는 식사에 신비의 명약이라도 넣었던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아무런 자극도 없는 닫힌 공간에서 매일 보는 가족들, 어쩔 수 없이 돌아오게 되는 잔소리와 짜증들 속에 살아가시던 어르신들이 치매센터를 나오시면서 또래 어르신들과 어울리시고 북치고 장구치는 시끌벅적함과 뭘 만지고 쓰러뜨려도 안전한 환경
속에서 어르신이 아직 유지하고 계신 건강한 뇌의 부분들이 즐거운 자극을 받고, 무엇보다도 어르신들의 스트레스가 적절히 배출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무조건 내 부모님은 내 집에서 모셔야만 한다는 고집은 과연 누굴 위한 결정인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주장은 사실 어머니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의 욕심이나 자식으로서의 체면 때문은 아닐지 엄격하게 되돌아보아야만 합니다. 치매에 걸리신 내 어머니께 필요한 것은 무엇을 만지고 얼마나 돌아다니던지 잔소리 듣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한 환경이며, 하루 종일 새롭고 신기한 자극을 통해서 아직은 살아있는 뇌의 활동을 증가시키는 재활 프로그램들이며 치매 어르신을 돌볼 수 있도록 훈련받은 전문가들로부터의 일관된 돌봄입니다. 내 집에 치매 어르신을 모심에 있어서 그런 건강한 환경을 제공해 드릴 수 없다면, 치매의 증상들이 진행되어 가정 내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면, 돌보는 자식의 마음이나 체면이 아닌, 어르신 자신을 위해서 가까운 치매센터나 노인전문병원 혹은 노인 요양원 등으로 모시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치매에 걸리신 부모님을 모시고 가야 할 새로운 여행에 고통과 절망만이 놓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아기가 되는 병이 바로 치매라는 말처럼 치매에 걸리신 어머니는 때론 어리광도 부리시고 투정도 부리시며 내게 의지하실 겁니다. 자식 된 우리가 어릴 적 우리 어머니가 날 돌보아주시고 이해해 주셨던 것처럼 이젠 우리가 부모님께 해 드려야 할 차례가 온 것입니다. 나 혼자서 모든 것을 희생해가며 하려 하기에 힘든 것입니다. 주위를 둘러보시면 어머님을 모시고 떠나는 여행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여러 기관들, 사회적 제도들,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치매 어르신은 우리 사회가 함께 보듬고 모셔야 할 사회의 어른들이시기에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전보다는 많이 나아진 제도와 전문기관들이 존재하며 또 앞으로는 분명 지금보다도 더 많은 사회적 도움이 만들어 질 것입니다.
치매에 걸린 부모님과 함께 내리막길을 걷는 여행을 출발함에 있어서 심호흡 한번 하시고 내 부모님의 손을 다시 한 번 꼬옥 따뜻하게 잡아 주십시오. 부모님과 나 분명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겁니다. 비록 그 길 위에 고통과 실망이 놓여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만나게 될 것들이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부모님 생의 마지막에 내가 그분을 위해서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 삶의 커다란 보람이 될 것이며 지금의 고민과 고통까지도 훗날 내 삶 속에 아름다운 색깔이 되어 물들 것입니다. 오늘도 치매 어르신과 함께 하시는 가족들에게 존경과 웅원의 마음을 보내드립니다. 

(치매정보지 ‘행복한 노년’ 7+8월호 12-1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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